그는 항일독립투쟁 중 만주 독립군의 비밀 특파원을 맡아 3·1 만세운동 기획에도 기여를 했다. 백부(伯父) 이상룡의 밀명(密命)으로 입국하여 파고다공원 3.1 운동을 돕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잡혀 태형 9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가 다시 망명한 것이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특파원으로 애국단체와 연결되어 활동하던 중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안창호의 지시로 황종화, 이영봉, 김규열과 모임을 갖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서 <적의 관공리가 된 동포에게>, <포고 제1호 남녀학생에게>, <포고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이에게> 를 비밀리에 대량 복사하여 배포하고 제2차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한던 중 체포되어 3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193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이 목사는 대구와 안동 등에 교회 16곳을 개척하고,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고 자선단체를 만들어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 반대로 4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심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추서: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