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독립운동가들이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것을 계기로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에 이어, 33인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점으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안동에서도 3월 11일 만세운동이 계획되었으나 주도세력이 검거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에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이용희)은 3월 13일인 장날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을 써서 들고 현 신한은행 앞에서 장터까지 만세를 부르며 내달렸다. 이상동의 이 단독만세 시위가 바탕이 되어 다음 안동 장날인 3월 18일과 23일에 2,500명과 3,000명이 참가하는 두 차례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동은 징역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법흥 문중 이승복과 이을성(이종록)도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징역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