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도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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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 망명
 
압록강을 건너는 길에 일제의 검색을 받는 한인들

1911년 1월, 종손으로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은 후, 집안의 노비문서를 태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일가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

안동~추풍령~서울~신의주~단동~환인현 횡도천~유하현 삼원포에 이르는 2천5백리의 망명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1911년 1월 5일. 안동의 석주 이상룡(李相龍)도 만주 망명길에 나서는데, 망명 기록인 「서사록(西徙錄)」에서 “저녁 무렵에 행장을 수습하여 홀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金大洛) 일가와 황호(黃濩) 일가, 김동삼(金東三) 일가 등 안동지역의 사대부들이 함께 집단 망명의 길에 나섰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자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집안의 손녀이기도 한 허은 여사는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이회영·이시영 형제는) 한일합방(경술국치)이 되자 이동녕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는 석주 이상룡 일가의 집단 망명이 우당 이회영 일가와 긴밀한 사전 협의 끝에 단행되었다는 중요한 증언이다.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이들이 횡도촌이란 만주의 한 작은 마을을 거쳐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란 마을에 집결했는데,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증언인 것이다.

 

 이상룡은 신의주에서 동생 이봉희(李鳳羲)를 비롯한 가족들과 상봉해 1911년 1월 27일 발거(跋車·설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넌다. 압록강을 도강하며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라는 시를 남긴다. 수레 안을 담요로 둘러싸서 추위를 막아야 했는데, 이상룡은 “어린 것들이 연일 굶다 못해 병이 날 지경이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런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이 만주의 횡도촌이었고, 재집결한 곳이 삼원보 추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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