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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 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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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4 15:30 조회9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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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에서 하얼빈까지] 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 (3)​​​​ 독립기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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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 魂 사른 독립기지 터에 비석 하나 없어서야…"

日警 피해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 개교
3·1운동 후 망명객 몰려 독립운동 활기
의열단·한국광복군 등 창설 주역 배출

안동인들이 처음 개척한 삼원포는 현재 조선족자치진으로 바뀌었다. 이곳을 가려면 통화시∼류허현간 4차로 국도를 1시간쯤 가다 류허현을 40㎞ 남겨두고, 서쪽방향으로 1㎞ 정도 들어가면 된다. 차 두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이 길은 지금 포장공사가 한창이라 진입이 불가능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국도변에서 대고산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합니하(哈泥河)신흥무관학교. 합니하는 혼강의 지류고, 혼강은 고구려 때 비류수다. 합니하는 만주어로 '수풀이 우거진 곳'이란 뜻이다. 이 지역은 논농사를 할 줄 모르던 만주족에겐 황무지였으나, 안동인들에겐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다.

만주에서 1년을 보낸 안동 레지스탕스들은 신흥강습소가 밀려드는 한인들로 인해 비좁아지고, 일경에 노출되는 빈도도 잦아지자 1912년 초부터 삼원포를 떠나 합니하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거처할 집과 학교를 같이 지었다. 1912년 6월7일 개교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5월까지 독립군 양성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엔 무관학교라는 명칭을 드러내고 쓸 처지가 못 돼 신흥중학 또는 신흥학교로 불렀다. 이 학교는 본과와 특별과를 두었다. 본과는 4년제 중학 과정이었고, 특별과는 3~6개월 기간의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초대교장은 여준, 교감은 이상룡이 맡았다. 교관과 학생들 중엔 안동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편 삼원포에 있는 신흥강습소는 백하의 아들 월송 김형식이 교장을 맡아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본국에서 망명객들이 물밀 듯 만주로 밀려오면서 독립운동도 활기를 띤다. 1920년 당시 서간도의 한인 인구는 약 25만명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합니하도 천험의 요새이긴 하나 지리적으로 외딴 곳이라 그 해 5월 학교 본부를 다시 교통이 편리한 삼원포 고산자 부근으로 옮기고, 더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는 분교로 뒀다.

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군 요원과 지도자를 배출했다. 지청천, 신팔균, 김광서의 경우 일본육사를 졸업했지만, 일본군대를 탈출해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약한 인물들이다.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열다섯에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졸업생 중 김원봉 등은 의열단을 조직, 국내에서 요인암살과 폭탄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40년 육군사관학교의 모태가 되는 한국 광복군 창설의 주역이 된다. 총사령관 지청천을 비롯해 참모장 이범석은 이 학교 교관 출신이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졸업한 생도는 3천500명 정도. 그러나 광복 후 이 학교 출신으로 드러난 졸업생은 겨우 306명뿐이다. 나머지는 숱한 전쟁터에서 산화했을 터. 이들 대부분은 서로군정서로 편입돼 1920년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다. 당시 서로군정서 독판(총재)은 이상룡이었고, 법무사장은 김형식, 참모부장은 김동삼이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안동레지스탕스들이 봉오동, 청산리대첩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삼원포에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까지는 남동쪽으로 약 35㎞ 거리다. 그러나 100리가 채 안되지만 길이 험하다. 버스는 삼원포에서 간구∼얼밀진을 지나 남쪽으로 가다 사방전자에서 다시 동쪽 길로 들어섰다. 광화진까지는 구불구불한 산길. 대부분 시멘트포장길이었으나, 비포장 길도 나온다. 1시간반쯤 지나 도착한 곳은 광화진 패루. 여기에서 약 4㎞쯤 가면 합니하가 나타난다. 선조들이 힘들게 다녔던 길을 버스로 편안히 가는 게 도리가 아닌 듯해 일행들은 버스에서 내려 신흥무관학교 터까지 다시 4㎞를 걸어가기로 했다. 주변의 산과 강, 들판은 한국의 여느 농촌과 비슷한 풍경이다. 1시간 남짓 걸어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현재 통화시 광화진 광화7대촌이다. 이 마을의 집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가족들이 거처하던곳이라고 하지만 현재 집들은 모두 새로 지은 것이 분명하다. 마을 뒤 나지막한 언덕 밑이 학교와 연병장터라고 하나, 어른 키보다 큰 옥수수만 들판을 메우고 있다. 지금 이곳에는 동포가 한 명도 살지 않으나 아직도 가오리촌(高麗村)으로 불린다고 한다.

메라파인더에 신흥무관학교터를 가능한한 다 집어 넣기 위해 언덕위로 올라갔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밑에서 본 모습과 딴판이다. 너른 들판이 앞으로 쭉 펼쳐져 있고, 크고 작은 산과 강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일행 중 한 명인 백하의 증손자 김시천씨(63)가 헐레벌떡 언덕 위로 올라왔다. 그는 "옥수수 밭에서 몰래 실컷 울어보려고 왔다"고 했다. 증조부와 조부의 땀과 피가 서린 곳이니 오죽 비감하겠는가. 후손들은 옛 신흥무관학교 터에서 옷깃을 여미고 묵념을 올렸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알리는 돌 비석 하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몇 해 전에도 중국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이곳에 돌 비석을 세웠지만 해당 인민정부가 이를 깨뜨려 없앴다고 한다. 중국으로선 자기 땅에 한인들이 세운 '무관학교'가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북간도엔 그래도 후손들이 옌볜조선족자치주를 이루고 있어 독립운동의 성지를 그나마 잘 보존하고 있다. 한국인들도 꽤 많이 찾는다. 그러나 북간도에 앞서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의 모태가 됐던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다. 한국정부와 관계기관의 관심이 요구된다. 중국과 협상을 통해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성지에 표지석만이라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착잡한 마음을 간직한 채 후손들은 다시 버스에 올라 백서농장으로 향했다. 모두들 마음이 무거웠던지 버스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 때 갑자기 동산 류인식의 후손인 류회붕씨(71)가 마이크를 잡고 "선조들처럼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한다"며 표지석 건립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곧바로 60만원이 넘는 정성이 모였다. 이들은 "이 작은 기금이 종자돈이 돼 표지석을 세울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기념관측에 성금을 건넸다. 역시 명가의 후손들답다.

백서농장(白西農庄)은 합니하에서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류허(柳河)현 량쉐이허즈(凉水河子)진 샤오베이차(小北)에 있다. 백서는 '백두산 서쪽'이라는 뜻이고, 농장은 실제 군영이다. 비밀유지를 위해 군영을 농장으로 가장한 것이다. 1914년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은 군영을 설치하기로 하고, 1년 뒤 샤오베이차에 병영을 완성했다. 농장주는 일송 김동삼이었다. 일송은 1917년부터 신흥학교 졸업생 385명을 백두산 기슭 골짜기에 입영시켜 농사와 군사훈련을 병행하게 했다. 이른바 자활특전대인 셈이다. 이들 속엔 안동인들의 후예가 다수 참여했다고 전한다. 1919년 백서농장은 서로군정서로 개편돼 사라졌지만 이곳에서 훈련받은 유격대원들은 항일유격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합니하에서 백서농장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다행히 지난해 가을 포장이 돼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눈이 쌓여 일반차량으로는 갈 수 없다. 이곳은 백두산자락 용강산맥에서 발원한 합니하의 상류지대다. 당시엔 사람의 발자취가 전혀 닫지 않은 삼림지대였다고 알려진다. 다디엔즈촌(大甸子村)과 바리초(八理哨)를 거쳐 샤오베이차 마을에 도착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산 자락에 10여호가 살고 있는 이곳에도 동포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집집마다 고구려시대의 곡식창고인 부경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 마을로 내려가니 바로 합니하가 나왔다. 강에는 유격장에서나 볼 수 있는 현수교가 설치돼 있다. 마을 주민들이 나무로 만든 것이다. 흔들거리는 다리 줄을 붙잡고 조심조심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또 옥수수바다다. 옛 군영자리는 옥수수 밭 사이에 있었다. 그곳에 가 깨진 기왓장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옥수숫대에 막혀 갈 수가 없다.
/글·사진=박진관기자(영남일보 2007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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