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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 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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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4 15:19 조회8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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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에서 하얼빈까지]만주로 간 안동 항일 명문가 (2)​​ 이주와 정착


"나라 찾는 抗日에 소작농 노릇인들 못하리오…"

괴나리봇짐 지고 추풍령∼서울∼신의주 거쳐
홑옷만 입고 압록강 칼바람 맞으며 도보 횡단
안동 사람 집성촌 삼원포가 독립운동 발상지
1910년 12월24일(음력),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일가를 필두로 안동을 떠난 레지스탕스들의 최종 종착지는 서간도 통화(通化)현 삼원포(三源浦).

이들은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삼삼오오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채 이역만리 길을 떠났다. 이들은 대개 추풍령~서울~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으로 가는 루트를 택했다. 추풍령까지는 걷거나 수레를 타고 갔으며, 추풍령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북상했다.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으면 단둥(丹東)이다.

"기차역까지 종들이 따라왔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자 주인들도 울고, 종들도 울었다. 생전 처음 기차를 탔다. 일본의 열차 수색원들이 칸마다 다니면서 독립지사를 잡아내려 감시를 했고, 한 의자에 두 사람씩만 앉게 했다." <허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아래윗니가 연방 방아질을 하였고, 손발은 얼어서 제 감각을 잃었다. 고놈의 추위 왜놈보다 더 독하다."<이해동 회고록 '만주생활 77년')

안동에서 솜옷을 모르고 살던 이들은 영하 20℃가 넘는 강추위에 홑옷만 몇 겹으로 걸친 채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보로 건넜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여도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또다시 내 처자를 넘겨다보니/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내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집을 나선 지도 한 달이 못 돼 압록강을 건넜으니/ 누가 나의 길을 더디게 할까보냐."

1911년 1월 엄동설한. 53세의 석주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장한 각오로 거국시(去國詩)를 읊었다.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열흘 넘게 마차를 타고 도착한 첫 기착지는 봉천성 회인현 항도촌(恒道村). 지금의 지린성 지안시 화디엔(花甸)진 헝루춘(橫路)촌 일대로 짐작된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의 서남쪽 줄기인 노령산맥이 압록강을 따라 뻗어있는 곳. 이들은 압록강을 거슬러 집안현까지 갔다가 다시 노령산맥을 타고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어떤 이들은 험한 육로보다 수로를 택하기도 했다.

1915년 초봄에 출발한 임은허씨 성산 허로(왕산 허위의 형)일가의 경우엔 압록강에서 네 척의 배를 타고 보름동안 강을 거슬러 올라가 회인현 화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당시 압록강 수로는 백두산에서 벌채한 나무를 옮기는 데 주로 이용했다. 고구려 때는 고구려 수군이 국내성 집안에서 압록강 물길을 타고 황해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1937년 일제 만주국이 수풍댐을 건설하면서부터 압록강 상류로는 갈 수가 없게 됐다.

화전진 횡로촌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 첫 도읍을 정했던 환런시 졸본성(오녀산성)과 지안시 국내성의 중간 지점이다.

서간도는 백두산 서쪽 압록강 너머 혼강(비류수)을 비롯해 송화강 중·상류지대로 관전, 신빈, 환인, 집안, 유화, 통화, 임강, 정우, 장백, 무송 등지의 남만주일대를 일컫는다. 당시 북간도(현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에는 서전서숙, 명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가 세워지는 등 함경도에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미 터전을 잡고 있었다. 특히 룽징(龍井)은 북간도 한인사회의 중심이었다. 서간도에도 평안도 이주민이 많았다. 관전현 부근에는 이미 강원도 출신 의병장 유인석을 비롯한 한말 의병들이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활약하고 있었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이주민들은 항도촌에서 고성이씨, 평해황씨 집안과 합류한 뒤 삼원포 인근에 정착지를 물색했다. 1911년 4월경 의성김씨 집안과 진성이씨 일가는 각각 삼원포 북쪽 이도구와 삼원포 남쪽 4㎞지점 만리고에 터를 잡았지만, 석주 일가는 토지와 집을 구하지 못해 삼원포 일대 영춘원, 대우구, 추가가 등지로 옮겨 다녔다. 이들은 자주 만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안동 레지스탕스들의 새로운 집성촌이 들어선 유하현 삼원포 일대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발상지다. 삼원포는 세 골의 물이 합해져 붙인 이름으로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아 벼농사에 적합했다. 이곳은 1895년 김구 등이 두 번이나 답사한 곳으로 알려진다. 이 후 이동녕, 이회영, 주진수 등 신민회의 주도아래 치밀하게 준비된 독립군기지였다.

이들은 대고산 아래에서 한인군중집회를 열고, 1911년 5월과 6월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으로 신식교육과 군사훈련을 함께 실시함)와 경학사(耕學社·만주지역 최초의 독립운동단체)를 잇따라 설립했다. 이후 경학사는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대한통의부-정의부 등으로 계승된다.

이 때 김대락은 신흥학교의 면학을 독려하는 권유문을 쓰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이 불렀던 신흥강습소의 교가 1절이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南)의 영절에/ 여러 만만 헌원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을 품에다 품어/ 젖 먹여 준 이가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가슴에."

여기서 헌원 자손이란 중국을 일컫고, 동해섬 어린 것은 일본을 말한다. 즉 우리 민족이 중국에게 문명을 전해주었고, 일본을 먹여주었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에게 드넓은 기상과 포부를 가질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상룡은 경학사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고, 성산 허로와 일송 김동삼이 각각 초대 부민단 단장과 부단장을 역임하는 등 안동 레지스탕스들은 서간도 독립군기지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당시 석주가 쓴 '대동역사'는 신흥학교의 역사교과서로, 만주 땅이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발상지이며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옛 터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들은 현지 중국인들과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머리와 복장을 중국식으로 했으며, 어학강습소를 설립해 한어교육을 하기도 했다.

서간도에 도착한 첫해 이들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반지주에서 졸지에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은 농사를 직접 지어본 적이 없는데다 변덕스러운 만주날씨에 적응을 못해 대흉작을 경험했다.

"고향에서는 양반이라고 말고삐 잡고 경향 간 내왕이나 하며 글이나 읽던 분들이 생전 해보지도 않고, 특히 듣거나 본 적도 없는 화전농사를 직접 하자니 고달프기 짝이 없다. 식수로는 도랑물을 먹었다. 그런데 그 해 오뉴월이 되자 그 물 때문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발병했다. '수토병'이라고도 하고 '만주열'이라고도 했는데 석달간 전염병이 돌아 노약자는 물론 젊은 사람도 많이 죽었다."(허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글·사진=박진관기자(영남일보 2007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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