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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 사대부들(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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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4 14:49 조회1,1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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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恥百年] (12)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 사대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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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 마을로 가는 길이다. 일제강점기 때 망명 독립운동가들은 추가가 가는 길을 걸어 추가가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와 경학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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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석주 이상룡 선생, 일송 김동삼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 한계 이승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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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중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이다. 임청각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가장 큰 골칫거리는 국경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던 만주 독립군이었다.

그런데 이 독립군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나라가 망했을 때 망국에 적극 가담했던 사대부들도 있었지만 나라를 되찾는데 목숨을 걸었던 사대부들도 있었다. 망명 사대부들이 만주에서 건설한 해외 독립운동기지가 독립군을 배출하는 수원지였다.

1910년 8월 쯤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 등은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직후 채근식(蔡根植)이 쓴 '무장독립운동비사'는 "신민회 간부의 비밀회의에서 독립기지 건설 건과 군관학교 설치 건을 결정했다"고 전하는데, 이 결정에 따라 이회영 등이 만주로 간 것이다.

만주에서 돌아온 이회영은 6형제 전 가족의 집단 망명을 권한다. 월남 이상재(李商在)가 “우당(이회영)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6형제 집단 망명은 놀라운 일이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 출신의 이회영 일가는 전 가산을 팔아 40만원의 거금을 만들어 1910년 12월 만주로 떠나는데, 현재의 쌀값으로 계산하면 약 600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이회영 일가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4년 전인 1906년에 망명길에 올랐던 인물이 이회영의 평생지기인 보재 이상설(李相卨)이었다. 의정부 참찬을 역임한 이상설은 만주 연길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열어 독립지사를 양성했다. 이상설은 이회영·이시영 형제들과 함께 양명학을 공부했던 인물이었다. 조선 후기 양명학은 이상설의 고향인 충청도 진천과 이건창(李建昌)이 살고 있던 경기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다. 성리학자들에게 이단으로 몰렸던 음지의 양명학자들이 나라가 망하자 집단 망명길에 나선 것이다.

조선 양명학의 비조인 하곡 정제두(鄭齊斗)의 후손인 기당 정원하(鄭元夏)는 고종 때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는데, 망국이 기정 사실이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 횡도촌(橫道村)에 자리를 잡았다. 그 직후 강화도에 세거하던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李建昇)도 가묘에 하직하고 “걸음마다 되돌아보며 마을문을 나선다"(步步回頭出洞門)는 시를 남기면서 망명길에 나섰다. 이건승은 개성에서 진천의 홍승헌(洪承憲)이 오기를 기다려 합류했다. 이건승과 홍승헌은 1910년 12월 초 중국인이 끄는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먼저 만주 횡도촌에 자리 잡은 정원하를 찾아간다. 서울의 이회영 일가와 충청도 진천과 강화도의 이상설·정원하·이건방·홍문헌 등은 대체로 소론(少論)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1911년 1월 5일. 안동의 석주 이상룡(李相龍)도 만주 망명길에 나서는데, 망명 기록인 「서사록(西徙錄)」에서 “저녁 무렵에 행장을 수습하여 홀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金大洛) 일가와 황호(黃濩) 일가, 김동삼(金東三) 일가 등 안동지역의 사대부들도 집단 망명에 나서는데, 이들의 당색은 주로 남인이었다. 그런데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자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집안의 손녀이기도 한 허은 여사는 구술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이회영·이시영 형제는)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는 석주 이상룡 일가의 집단 망명이 우당 이회영 일가와 긴밀한 사전 협의 끝에 단행되었다는 중요한 증언이다.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이들이 횡도촌이란 만주의 한 작은 마을을 거쳐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란 마을에 집결했는데,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증언인 것이다.

망명 도중 이상룡은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읽고 그 소감을 적었는데,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法門)이 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히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그 평생의 지절은 빼어나고 정신은 강렬하였다”면서 “세상의 구제를 자임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이상룡은 양명학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들은 그가 내심 양명학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경상도 성주 출신의 유림 한계 이승희(李承熙)는 이들보다 먼저 망명해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한민족이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의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한다. 이승희의 부친은 영남 유림의 거두 한주 이진상(李震相)이다.

이진상은 이황과 같은 성리학자들이 심(心)과 이(理)를 별개로 보는 것과 달리 심(心)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심즉리설은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진상의 학맥인 한주학파에서 면우 곽종석(郭鍾錫)·회당 장석영(張錫英)·심산 김창숙(金昌淑) 등 많은 유림계 독립운동가가 나왔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나라가 멸망한 후 집단 망명에 나섰던 사대부들의 당파는 주로 소론과 남인 계열인데, 이들이 양명학자이거나 양명학에 우호적이라는 사실이다. 성리학자들에게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자들이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역설이었다.

이상룡은 신의주에서 동생 이봉희(李鳳羲)를 비롯한 가족들과 상봉해 1911년 1월 27일 발거(跋車·설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넌다. 압록강을 도강하며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라는 시를 남긴다. 수레 안을 담요로 둘러싸서 추위를 막아야 했는데, 이상룡은 “어린 것들이 연일 굶다 못해 병이 날 지경이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런 고생 끝에 도착한 곳도 만주의 횡도촌이었고, 재집결한 곳이 삼원보 추가가였다.

1911년 4월 망명 사대부들과 이주 한인 수백명은 추가가 마을 뒤의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민단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이상룡(혹은 이철영)을 사장으로 추대했다.

'경학사취지서'는 “부여의 옛 땅은 눈강(嫩江·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은 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의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은 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포들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 유학자들이 드디어 사대주의의 틀을 깨고 만주를 조상들의 땅이라고 선포한 것이었다.

경학사는 현지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무관학교를 여는데,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일생을 건 사대부들이 만든 독립운동 근거지였고, 여기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양성되었다.

또 하나의 흐름은 평안도 의주 출신의 유학자 조병준(趙秉準)을 들 수 있다. 만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는 조병준의 문인들 중에서 참의부 참의장 김승학(金承學)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차별받았던 서북 지역의 유학자들이 나라가 망하자 역시 독립운동에 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설이었다.

이런 사대부들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기에 무작정 만주로 건너간 젊은 청년들이 독립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의 근원이자 그 뿌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매일신문 2010년 0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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