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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 석주 이상룡 가문 9명·왕산 허위 가문 4명, 代이은 독립운​​​​동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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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4 14:36 조회1,3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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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 9·왕산 허위 선생 가문 4, 이은 독립운​​​​史​​​​

 

항일 겹사돈 3양가 합쳐 독립유공자만 13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과 왕산 허위(許蔿·1855~1908) 선생 가문은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다. 두 가문에서 수십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각각 9명과 4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두 집안 후손들은 "굳이 나누어 셈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혼인으로 맺어진 사돈지간이기 때문이다.

 

이상룡 선생은 고성 이씨(固城李氏) 종손으로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유학자였다. 조선 전기 경북 안동에 지어진 종택(宗宅) 임청각(臨淸閣)99칸의 저택이었을 정도로 부호이기도 했다. 국운이 기울자 1905년 가야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해 구국 계몽운동을 펼쳤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초 가산을 정리해 친인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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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선생은 김해 허씨(金海許氏),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그해 의병을 조직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저항했다. 한성 탈환작전 등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수 1호로 기록됐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 지었다. 그의 일가는 1912년과 1915년 두 차례에 걸쳐 서간도로 갔다.

 

이상룡·허위 가문 겹사돈 맺어

 

이상룡 가문과 허위 가문은 겹사돈을 맺었다. 서간도로 이주한 직후 이상룡 선생의 손녀 이후석 여사와 허위 선생의 아들 허국 선생이 혼인을 했다. 1922년엔 이상룡 선생의 손자 이병화 선생과 허위 선생 사촌의 손녀딸 허은 여사가 결혼했다. 허은 여사는 1995년 출간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항일 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 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이 다 운명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썼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인 김희곤 안동대(사학과) 교수는 "만주 등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집안끼리 사돈을 맺은 경우가 꽤 된다""고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미 친분을 유지한 집안도 많았다"고 했다. 독립운동가인 안중근·김구, 이회영·정회영도 집안끼리 사돈관계였다.

 

1922년 결혼한 허은 여사는 2800(1100) 거리를 24일 동안 이동해 시댁에 도착했다. 그는 첫날 시집살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엌에 들어가 조석을 장만하려니 장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땔나무도 없었고 식량도 없었다. 간장이나 된장이 없기는 친정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이상룡 선생은 고국에서 정리한 가산을 독립운동 하는 데 모두 썼다. 이회영·이동녕 선생 등과 함께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와 교육기관인 신흥(新興)강습소를 설립했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성장해 3500명 이상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상룡 선생은 1919년 서간도의 독립군 부대인 서로군정서 독판(원수)이 됐고,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집안 전 재산을 광복운동에 쏟아 부은 것은 허위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구미 일대에 있던 3000석의 재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독립운동에 썼다.

 

"전 재산 독립운동에 쏟아 부어"

 

광복 이후에도 두 가문은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다. 허씨 일가는 1920년대 후반 연해주로 대부분 이동했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후손들은 현재 모스크바나 연해주,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씨 일가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1932년 이상룡 선생이 서거하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상룡 선생의 증손 7남매 중 첫째부터 넷째가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다섯째 증손자와 여섯째 증손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아원에 맡겨져 학교를 다녔다. 막내 증손자 이범증(68)씨는 14일 본지 통화에서 "중학교 때 학비를 못 내 중퇴하고 농사를 지은 적도 있다""집안 형편이 좀 나아질 만하니까 1997년 어머니(허은)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허은 여사는 회고록에서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 앞에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선대의 긍지가 그들 핏속에 자존심으로 살아 있구나 싶다'고 했다.

 

이씨 집안에선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형제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와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당숙(堂叔)인 이승화 선생 등이 훈장을 받았다. 이상룡 선생의 매부 박경종 선생과 처남 김대락 선생에게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허씨 집안에선 허위 선생과 그의 형제인 허훈·허겸, 아들 허영 선생에게 훈장이 수여됐다. 허위 사촌의 딸 허길은 시인 이육사 선생의 어머니이다. (조선일보 20128.15일자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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