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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許銀) 회고록(1) >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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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 |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許銀) 회고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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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3 17:21 조회1,3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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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許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한준호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원)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는 의병장 왕산 허위 집안에서 태어나 서간도 독립군 최고지도자인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1907~1997) 여사의 구술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3대 독립운동가를 지켜낸 한 여인의 진정한 희생 가치를 느끼게 해 준다.

 

 

구술자 허은 여사

 

허은의 고향은 경북 구미시 임은동이다. 의병항쟁과 만주지역 항일투쟁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왕산 허위(許蔿)로 대표되는 임은 허 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허위는 1896년에 경북 김천에서 김산의진을, 그의 큰형 허훈은 경북 청송에서 진보의진을 이끌었으며, 셋째 형 허겸은 형과 아우를 도와 의병항쟁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허위는 1907년에 전국 연합의진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지만,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허위의 뜻을 이은 허겸·허형·허필 등은 가족을 이끌고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또 허위의 제자 박상진은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1907년 정월 그녀는 4남매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허발(1872~1955)이고, 어머니는 영천 이씨이다. 허발의 여동생 허길(許佶)은 민족시인이자 의열투쟁가인 이육사(李陸史)의 어머니이다. 또 그녀의 할아버지 허형(許蘅, 1843~1922)은 허훈·허겸·허위 등과 종형제간이다. 정리하자면 그녀의 재종조부가 왕산 허위이고,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고모인 것이다.

 

허은이 여덟 살 되던 1915년 음력 3, 일제에게 시달리던 그녀의 가족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작은할아버지 허필과 작은아버지 허규 가족들이 함께였다. 이들은 기차로 서울 남대문을 거쳐 신의주에 도착한 후, 배로 보름동안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요령성 환인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육로를 통해 허위 가족이 정착해 있는 길림성 통화현 당황구로 이동하였다.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온갖 고난을 견뎌야 했다. 굶주림과 추위, 각종 전염병과 맞서야 했으며, 목숨을 위협하는 일제와 중국 마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또 조국 독립도 포기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작은 할아버지·아버지·작은아버지 등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할아버지는 1922년 북만주 목단강에서, 작은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열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허발과 작은아버지 허규는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항일투쟁을 펼쳤다.

 

1920년 경신참변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북만주 철령하(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에 살고 있던 허은은 1922년에 결혼했는 데, 시댁은 길림성 화전이었다. 시할아버지는 서간도 독립군 최고지도자인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이었고, 남편 이병화(李炳華, 1906~1952)는 그의 손자였다.

이상룡은 경북 안동 임청각 출신이다. 그는 정재 류치명의 문인으로 퇴계학맥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대부분의 유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이상룡은 안동 내앞마을의 김대락(金大洛)과 함께 청장년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에서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그는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며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상룡은 1932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순국할 때,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 되니, 이곳에 묻어 두고 기다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이상룡의 삶과 독립의지는 가족·친척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종숙 이승화 등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특히 아들 이준형은 대한협회 안동지회 사무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에는 경학사·한족회·서로군정서·정의부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에는 한족노동당을 창립한 후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다 그는 1932년 고향 안동으로 돌아와 구국운동을 전개하

, 1942년에 국운을 비관하며 자결하였다.

손자 이병화는 만주에서 대한통의부·한족노동당·고려공산청년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45월 청성진 경찰주재소의 습격과 관련하여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허은의 시집살이는 하루하루 부족한 땟거리를 마련하고, 항일투사들의 옷을 직접 지어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들을 잘 보필해 드리는 것이 곧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1932년 끝내 시할아버지 이상룡이 머나먼 만주 땅에서 순국하였고, 허은은 시할머니 김우락과 시부모를 모시고 안동 임청각으로 돌아왔다.

임청각을 처음 대면한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으나, 그것도 잠시 슬픔이 연속되었다. 귀국 후 1년이 채 되지 않은 19334월 시할머니가 삶을 마감하였고, 시아버지 이준형(李濬衡, 1875~1942)1942년에, 2년 뒤인 1944년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그렇게 원하던 조국 광복을 맞았지만 1952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편 이병화를 잃고 말았다. 이는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임청각(臨淸閣)을 종부로서 홀로 지키고 있던 허은에게 1990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흑룡강성 취원창에 있던 시할아버지 이상룡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오고, 남편 이병화가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것이다. 이어 광복 50주년인 1995, 그녀는 자신의 만주생활을 담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발간했다. 여덟 살에 아버지 손을 잡고 만주로 망명한 허은! 그녀는 그곳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독립운동가들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것이 곧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온 그녀는 1997년 만주 벌판의 바람소리를 귀에 담은 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회고록의 구성과 그 내용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나온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는 경술국치 100주년인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다시 발간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허은 여사의 구술체를 최대한 살리면서 문헌자료와 사실관계에 비추어 잘못된 지명· 인명 등을 바로 잡았다. 또 처음에 실린 사진화보와 추가로 발굴된 관련 자료를 본문 안에 넣었다. 그리고 부록에 그녀의 아들 이항증이 쓴 나라사랑을 실천한 충절의 현장 임청각을 추가하였다.

 

회고록은 제1장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다, 2장 항일투쟁과 이민생활, 3장 환국과 해방 그리고, 회고의 말·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왕산 허위 집안의 의병항쟁과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재종조부 허위의 순국 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망명하는 과정을 담았다. 눈에 띄는 것은 신의주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간도로 망명하였다는 점이다. 1911년 안동의 이상룡·김대락 등이 중국 단동에서 육로를 이용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후 그들이 정착하는 험난한 모습을 그렸으며, 독립군 양성기관 흥무관학교와 한인자치단체 부민단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장 끝에는 1920년 경신참변으로 일제의 손이 미치는 않는 북만주 곳곳으로 집안이 흩어지는 모습을 담았다.

 

2장의 주요 내용은 결혼과 시집살이, 그리고 시할아버지 이상룡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과 순국이다. 먼저 시집가는 모습이 나온다. 허은은 하얼빈·장춘을 거쳐 시댁인 길림성 화전까지 28백리 길을 이동하였다. 그때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중략) 이천팔백 리 먼 길은 내 시집가는 길이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되었겠는가 즉 조국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시댁에 도착한 허은이 이상룡·이준형·이병화 등 시댁 가족은 물론 만주지역 항일투사들의 그림자가 되어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는 모습을 그렸다. 서로군정서 회의와 같은 각종 회의가 시집에서 열리다보니 대접할 끼니를 마련하는 일. 감기가 들었는데도 쉴 수가 없어 부뚜막에 쓰러진 일. 그녀의 손으로 일송 김동삼·월송 김형식과 같은 독립운동가에게 옷을 만들어 드렸던 일, 허은은 이 모든 것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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