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 | 석주 이상룡선생의 망명길을 따라(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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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3 15:55 조회1,4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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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선생의 망명길을 따라(글/강윤정 - 경상북도독립기념관 학예실장) |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자취를 따라 만주로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는 2005년 9월부터『석주유고(石洲遺稿)』역주(譯註) 작업을 시작하였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우리 일행은 석주 이상룡선생님(이하 석주)의 해외 활동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정확한 역주를 위한 지명확인은 물론 만주 땅을 밟고 서있던 석주를 가슴으로 느끼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석주의 사상과 문학, 그리고 독립운동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길이라는 확신에서였다. 팀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던 나는 여정 준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한국근대 역동의 현장을 마주한다는 가슴 벅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여러 차례 해외 독립운동지를 조사하였던 김희곤 교수님과 현지 연변대학교의 김춘선 교수님덕분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
심양(瀋陽)에서 신빈(新賓)까지 懷仁縣北山 賃空宅 爲暫留之計 破屋三間掩莽榛 집안으로 향하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눈이 내려 다시 통화현(通化縣)으로 길을 틀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굵은 눈이 내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설경(雪景)이 우리를 압도했고, 시린 발로 망명길에 올랐던 옛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이상과 포부를 가슴에 안은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고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던 아이들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서렸다. 누가 시작했는지 설경과 묘한 설움에 취해 ‘선구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모두의 마음이 같았을까. 누군가에 의해 시작된 노래는 합창으로 끝났다. 선구자로 시작된 일행들의 잔잔한 노래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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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新賓)에서 집안(集安)으로 둘째 날인 2월 14일 우리는 신빈을 떠나 집안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는 어젯밤 야화가 이어졌다. 낮선 타지에서 긴장으로 피곤하였으련만 신빈시내에서 새벽까지 추억거리를 만든 것 같았다. 집안은 길림성(吉林省)의 남부에 있는 현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서기 3년(유리왕 22년)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이후 집안의 국내성은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다. 즉 집안은 고구려 중흥기의 중심지였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늘 입으로만 이야기하던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광개토대왕비?장군총? 고구려고분벽화를 본다고 생각하니 짜릿한 기대가 밀려왔다. 현지시간으로 8시 30분에 숙소를 출발, 2시간 30분을 달려 내일 유숙할 통화시내를 경유하였다. 통화시내를 끼고 흐르는 혼강(渾江)을 뒤로하고 다시 한 시간을 달린 우리는 11시 20분경에 집안 경계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눈 덮인 노령산맥은 다시 우리를 긴장하게 했다. 어제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2월에 만주답사를 감행한 것 자체가 무리였으리라. 다행히 우리일행은 노령산맥을 무사히 넘었다. 노령산맥은 천험의 요새, 그 자체였다. 고구려의 활발한 정복사업을 가능하게 했던 자연 요새였다. 우리는 집안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2시 30분경부터 오회분(五灰墳)과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현재까지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을 탐방했다. 4시 30분경 우리는 장군총에서 출발하여 압록강가에 도착했다. 압록강은 숱한 피와 역사를 머금은 채 인간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흐르고 있었고,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북쪽도 그저 조용했다. 우리는 압록강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의 성터에 도착했다. 석축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석축조차도 보존에 신경을 써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으리라. 국내성을 끝으로 둘째 날의 여정을 마치고 우리는 집안시내에 투숙했다. 저녁에는 석주의 사상과 독립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세미나가 이어졌다. |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3일째인 15일 우리는 집안을 떠나 석주의 1910년대 활동지인 통화현으로 향했다. 첫날의 일정 변경으로 오전일정에 약간의 여유가 생겨 우리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에서 활약했던 중국인 양정우의 기념관에 들렀다. 양정우의 기념관에서 동북항일연군 3로군에서 활약했던 허형식과 같은 인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합니하(哈泥河)를 향해 출발했다. 1911년 유하현에 정착하였던 한인지도자들은 1912년 초부터 통하현의 합니하로 옮겨갔다. 석주의 매형 백하 김대락(金大洛)도 이 무렵 합니하로 이주하였다. 1912년 한인지도자들의 이주와 더불어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세워졌던 신흥학교의 본교도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석주가족이 합니하쪽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은 없다. 석주일가는 1911년 2월 15일부터 환인현 항도촌 북산과 두릉구(杜陵溝)에 머물다 5월 하순 유하현과 통화현 경계에 위치한 영춘원(永春源)으로 이사를 했다. 그 후 10월 하순 다시 유하현 대우구(大牛溝)로 가족이 옮겨간다. 석주는 이곳 대우구에 머무르면서 합니하를 오가며 활동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통화현 합니하의 현재 행정지명은 통화현 광화진(光華鎭) 광화촌(光華村) 제7촌민소조(第七村民小組)이다. 옛 지명을 가지고 우리끼리 왔더라면 도저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통화시내의 한중각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1시경에 통화시내를 출발해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향해 달렸다. 2시간을 달리는 동안 끝없이 펼쳐지는 설경(雪景)은 장관이었다. 일행을 둘러보니 몇몇은 자고 있었다. 석주의 행적을 따라간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발했던 팀원들이지만 3일째 계속되는 여정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2시 20분경 드디어 광화진에 도착했다. 우리는 광화진 ‘중심소학교’를 끼고 우회전하여 합니하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얼마 뒤 북쪽 언덕위에 평지가 나타났다.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끝없는 평원은 군사훈련을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천험의 요새였다. 우리는 신흥무관학교를 떠나오면서 “자유의 낙원을 창조하고 이천만 동포를 이끌어야 한다”고 힘차게 노래하던 생도들에게 숙연한 묵념을 올렸다. 더불어 대우구와 합니하를 오가며 분주히 활동했던 석주의 뜨거운 열정과 의지 앞에 묵념을 올렸다. |
통화현(通化縣)에서 유하현(柳河縣)으로 大牛溝秋夜 대우구의 가을 밤 布衾年久冷如霜 이불이 낡고 낡아서 차갑기가 서리 같은지라 우리는 대우구를 출발해 고산자(孤山子)로 향했다. 현재의 행정지명으로는 유하현 전승향(全勝鄕)이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에 설치되었던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고산자 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그 본부를 옮기고, 합니하에는 분교를 두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군정부와 한족회가 조직되고, 독립운동이 고조되면서 교통이 편리한 삼원포 고산자부근으로 본부를 이전하여 무관학교를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끝으로 4일째 일정을 마치고 반석(磐石)으로 출발했다. 1910년대 석주의 활동무대를 떠나 1920년대 활동했던 반석시로 우리도 여정을 옮겨갔다. 반석에서 길림으로 |
석주의 임종지, 그 혼은 우리삶의 화두가 되어 다음날인 18일 석주의 임종지인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으로 출발했다. 긴 여정에 지쳐 모두 잠이 들었다. 이날 길림의 날씨는 비교적 포근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요령성 환인에서 통화와 유하, 해룡, 화전, 반석에서 이 곳 길림성 서란까지 북쪽으로 옮겨 옮겨오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석주를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서란현에 도착하여 먼저 군령역(群岺驛)에 들렀다. 1937년 석주의 조카 이광국과 이광민이 석주의 유해를 흑룡강성 취원창(聚源昶)으로 옮겨갈 때 그 유해가 떠나던 역이다. 1시 45분경 우리는 석주의 마지막 행로인 소과전자에 도착했다. 당시 지명으로는 서란현 대북구(大北區) 소과둔(燒鍋屯)이었으나 현재지명은 서란현 이도향(二道鄕) 소과전자(燒鍋甸子)이다. 석주 일가가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1929년이다. 석주는 1932년까지 이곳에서 만년을 쓸쓸이 보내다 임종을 맞게 된다. 우리는 당시에 사용하던 우물터가 남아있다고 해서 찾아보았으나, 3년 전에 그 우물마저 매립을 해서 주민들에게 물어 찾아야만 했다. 우리는 석주의 마지막 임종지에서 묵념을 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슬픔과 한 인간에 대한 존경이 밀려왔다. 이국땅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만주 한인사회의 안정을 위해 죽는 날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한 인간의 의지 앞에서 진정한 지도자와 지식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석주가 그리 원하던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진정으로 원하던 독립된 나라를 보지 못하고 죽어간 숱한 생명들을 디디고 있는 나는 매순간 무엇을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반문해 보았다. 그것이 6박 7일간 눈과 얼음의 세상에서 만난 석주가 우리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안동> |